잊지못할 추억의 농구선수 - 조동기 편
지나가다가 '이건 또 뭐야?'하고 들어오신 분이 있다면, 옛날 이야기라는 거 미리 알리고 시작해야했다. 무슨 쌍팔년도 얘기까지는 아니지만, 10년전이면 요즘 시대에서는 옛날이고 할만하지 않겠나.
조동기라고? 그게 뭐하는 인간인데? 안다면 아마도 오래전부터 한국농구를 즐겨보신 올드팬일 가능성이 높다. 글쎄, 대다수의 젊은 프로농구팬이라면 '뭐야? 이런 쉐이도 있었어?.하는 반응이 아마 일반적일 터.
그러나 90년대 한국농구계..그것도 센터의 계보에서 조동기라는 이름은 그렇게 허투루 흘려넘길 뉘집 강아지 이름이 아니다. 슬램덩크와 농구대잔치 세대에서, 조동기는 당시 중앙대의 주전센터로서 김영만,양경민 등과 함께 대학 돌풍(93-94시즌 4강)의 주역이었고, 프로(당시는 실업)에 진출해서는 노쇠했던 선배 김유택,한기범의 대를 이어 기아 왕조의 우승재탈환(94-95농구대잔치)에 공헌했던 리그 정상급 센터였다.
동기 형님께서 누군지 궁금하다면 30대 이상의 올드팬에게 물어보시라. 대부분 이렇게 야그하리라.'아, 그 남희석 닮은 애?' 센터로서는 다소 마른 체형에 처진 어깨, 개그맨 남모씨와 흡사한 외모의 소유자로, 남들은 소위 얼짱 각도라 불리는 45도 측면에서 관찰하면 오히려 맹구나 영구로도 보이는 카리스마 결핍의 마스크에서 위대한 선수의 풍모를 느끼기는 아마 어려울 것이라.
그러나 조동기는 명실공히 90년대를 대표하는 한국의 정상급 센터였고, 실제로도 여러 차례 대표팀에도 발탁된 경력을 지니고 있다. 이런 뛰어난 발자취에도 불구하고 동시대를 풍미한 센터들이었던 용가리,하마,전철 등에 비하여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것은 그가 당시 한국농구의 '아날로그 세대'를 대표하는 마지막 정통센터였기 때문이다.
90년대 초반부터 한국 농구의 중심이 외곽에 기울어져있었던 것은 모두가 다 아실 터(뭐, 지금이라고 크게 다른건 아니지만). 그러나 용가리처럼 뛰어난 신체조건에 기동력(지금이야 느려터졌지만 당시엔 용가리도 제법 빨랐음), 탁월한 운동능력과 넓은 슛 범위까지 겸비한 '공격형 빅맨'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리그의 패러다임을 변화시켰던 것이다.
90년대 기아자동차가 한국농구를 독점하던 시기에 대학들이 선배 실업팀들을 제압하고 돌풍을 일으킬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공격형 빅맨들의 득세와 문경은,우지원,김영만등 190대 이상의 빠르고 날렵한 장신 포워드들의 존재가 절대적이었다.
이전의 한국 센터들은, 비교적 단신에 직접적인 공격보다는 스크린과 박스 아웃, 리바운드 등을 통해서 외곽 슈터들에 찬스를 만들어주는 도우미의 성격이 강했다. 조동기는 전성기 당시에도 화려한 플레이보다는 묵묵히 블루 워커의 사명을 다하는 전형적인 '수비형 센터'였다.
그렇다고 조동기가 전혀 공격력이 없는 선수였다하면 그런 것은 아니었다. 뛰어난 외곽 슈터들을 중심으로 하는 스타일이었던 중앙대와 기아,상무 등에서 주로 선수생활을 하면서 공격 시도 자체가 적었을 뿐, 가끔씩은 페인트존 내에서 위력적인 중거리슛으로 20득점 안팎의 득점을 올리기도 하는 센스있는 선수였다.
하지만 조동기의 강점은 뭐니뭐니해도 블록슛, 당시 국내 선수들도 점차 서구형으로 장신화되고 탄탄해지던 시기에 197센티 정도의 신장에 여윈 몸으로도, 조동기는 거친 장신선수들과 맞붙어 밀리지 않을 정도로 근성있었던 선수였다. 골밑에서의 저돌적인 투지로, 조동기는 종종 결정적인 순간에 위력적인 블록슛으로 팀에 공헌한 적이 많았다. 국내 선수중에서 경기당 평균 1개 이상의 블록슛이 가능한 선수는 조동기를 제외하고는 당시 용가리와 경호 형 정도밖에 없었다.
더구나 그가 속해있었던 팀에서는 상대적으로 조동기가 궂은 일을 해야되는 경우가 많았다. 중앙대에 시절당시 센터로 입학했던 후배 김영만, 양경민이 슈터로 전향한데다 또다른 센터 안병익의 기량은 기대에 못미쳤다. 기아 시절에는 그가 데뷔할 당시부터 김유택, 한기범이 이미 노쇠화로 전성기의 기량을 잃어가며 상대적으로 많은 부분을 조동기에 의지해야했고, 상무 시절에는 아예 자신을 제외하고는 정통 센터가 단 한명도 없었다.(김제훈(연세대 졸)이 있었지만, 포워드에 가까운 선수로 수준급 빅맨과는 거리가 있었다.)
그가 가장 인상적인 활약을 보였던 시즌은, 대략 94년에서 97년까지. 중앙대 졸업반으로 합류했던 93-94시즌 농구대잔치에서 중앙대 OB나 다름없던 기아자동차를 물리치고 4강에 진출했을때 당시 최고의 센터(노쇠화하는 중이었지만)였던 김유택을 잇달아 블록슛하며 팀 승리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이어진 94-95시즌부터는 기아의 루키로 합류하여 자신이 울렸던 팀에게 우승의 기쁨을 다시 안겼다. 95-96시즌과 96-97시즌에는 상무 소속으로 농구대잔치 결승에 올라 3년 연속 챔프전에 진출하는 기쁨을 누렸지만, 소속팀 기아와 용가리를 앞세운 연세대의 벽에 막혀 연속 우승에는 실패했다.
94-95시즌 팀 선배 김유택이 노쇠화로 95시즌 abc 대표팀를 고사하며 조동기는 대표팀에도 발탁되었다. 이후 ABC 대회 준우승(우승은 중국)과 애틀랜타 올림픽(....은 7전 전패)에도 출전했으나 대표팀에서는 당시 주전이었던 전철과 하마에게 밀려 많은 플레잉 타임을 기록하지는 못했다.
프로농구 출범이전까지 꾸준히 국내의 몇 안되는 수준급 빅맨으로 성공가도를 달려오던 조동기가 순식간에 몰락한 것은, 바로 외국인 선수의 등장때문. 프로농구의 성급한 출발이 가져온 부작용이 바로 용가리나 김주성같은 소수의 예외를 제외하고 재능있던 국내 센터진의 단체 고사라는 사실은 모두 잘 아실터.
장신에 탁월한 운동능력, 공격센스, 정교한 슈팅 등을 고루 갖춘 외국인 선수들에 비하여, 빈약한 체격에 처지는 운동능력으로 국내에서도 수비형 센터의 역할만을 전담했던 조동기 같은 선수는 몰락 1순위였다. 역시 대표적인 피해자중의 하나였던 김유택이 그나마 팀의 배려속에 식스맨으로 나름의 활약을 펼쳤고, 김제훈이나 전철같은 선수들은 포워드로 전향하며 생존했으나 모든 면에서 어정쩡했던 조동기는 상무에서 제대후, 소속팀을 전전하며 5분내지 10분의 플레잉타임을 커버하는 벤치의 박수맨으로 전락했다.
문경은이나 김승기처럼 같은 학번 선수들이 슈터/가드라는 세분화된 포지션으로 인해 프로농구에서 나름대로의 생존방법을 찾았던 것과 대조적으로 골밑에서 직접적이고 외국 얼라들과 부딪혀야했던 동기 형님께서는 뛰어난 근성에도 불구하고 연약한 체구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채 외국 얼라들의 위력적 배치기 한방에 냅따 튕겨나가는 수모를 감내해야한 했다.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 국내 센터들은 대부분 달라진 패러다임에 적응하지 못했다. 이창수나 이은호처럼 벤취멤버로 분명한 역할을 인정받은 것도 아니고,그래도 동기 형님께서는 한때 국가대표로 국제무대를 누비기도했던 스타급 선수였건만 그 몰락치고는 너무도 갑작스럽다 못해 처참했다.
새로운 프로농구는 빅맨들의 활발한 운동능력을 요구하고 있다. 세계적인 포지션 파괴의 바람 속에서 넓은 슛 범위, 공을 운반할수 있는 드리블링 능력 등 다양한 테크닉을 보유한 선수들이 환영받고 있다. 그러나 아쉬운 것은 국내 장신선수들의 슈팅 능력은 많이 향상되었지만, 걸출한 외국인 선수들을 피하여 장신을 효율적으로 활용할수 있는 포스트업 능력이나 몸싸움, 위기 상황에서의 볼 컨트롤 능력 등은 오히려 예전보다 처지는 추세다.
조동기의 비극은, 달라진 추세에서 생존해나가야하는 국내 선수들의 현실과 함께 기본기의 중요성을 다시 환기하게 만든다. 정통센터를 점차 기피하고 있는 현실속에서 잔재주와 어설픈 개인기에만 의존한 장신 선수들의 불균형 성장은, 차세대 빅맨을 요구하고 있는 한국농구의 대안이 되지 못할 것이다.
오해는 마시라. 또 옛날 이야기를 한다고 해서 노친네마냥, 막연히 그때가 좋았지..따위의 향수 타령이나 하려는게 아니다.(아직 그리 오래산 것도 아니고) 현재는 현재대로 의미가 있는 것이고, 과거의 기억은 기억대로 또 정겨운 추억담이 된다.하지만 가끔은 허재나 강동희같은 걸출한 스타가 아닌 이상, 한 시대를 풍미했던 훌륭한 선수들이 너무 쉽게 별볼일없는 인간으로 잊혀진다는게 아쉬울 따름이다.
지난번에 경호 형님 편에서 언급할때도 그렇지만, 지금 두각을 나타내는 수많은 스타들을 놔두고 왜 하필 구닥다리 느려터진 옛날 센터들에 유독 집착하는 이유는, 바로 화려한 선수보다는 개인의 분투와 노력에도 불구하고 빛을 발하지 못한 '못다핀 꽃 한송이'에 대한 아쉬움이랄까.
시대의 운이 따라주지 않아서,혹은 스스로의 부족함으로 경쟁 사회에서 밀려났을지라도, 순간 캡쳐의 사진마냥, 기록은 영원히 남는 법이니. 우리 스포츠는, 특히 농구는, 아직 역사의 중요성에 대해서 깊이 생각하지 않고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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